[회원인터뷰] “화려한 복귀” 다시 민변! 다시 장길완! / 장길완 회원

2025-07-01 152

 

“화려한 복귀” 다시 민변! 다시 장길완!

– 장길완 회원

 

뉴스레터 제271호에서는 “다시 민변! 다시 장길완!” 3년간의 대체복무를 마치고 민변 상근 활동가로 화려하게 복귀한 장길완 간사를 만나보았습니다. 길었던 3년의 시간을 모두 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간의 이야기들을 회원분들에게 전하려 합니다.

 

○ 박선아, 조상필

: 반갑습니다. 출판홍보팀 박선아, 조상필입니다. 장길완 간사님이 3년간의 대체복무를 마치고 다시 민변으로 복귀하셨습니다. 모임의 회원분들께 복귀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 장길완

: 네 반갑습니다. 저는 민변에서 2017년부터 상근하고 있는 장길완입니다. 지난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교정시설에서 대체복무를 하느라 민변을 잠시 떠나있다가 올해 5월에 소집 해제되어 민변에 복귀하였습니다.

 

○조상필

: 대체복무가 끝나고 쉬지도 못하고 바로 복귀하셨군요?

○ 장길완

: 휴가를 17일 정도 가득 모아서 소집 해제 전날까지 쉬고, 2~3주 더 지나 복귀해서 거의 한 달은 쉬었어요. 그 사이 상해와 도쿄 여행도 갔다 왔어요. 한 달이 충분히 쉰 건 아닐 수 있지만, 회원분들이 12·3계엄 이후 윤석열 퇴진 활동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고 사무처도 상근자 한 명의 자리를 빨리 채우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바로 복귀했습니다.

 

○ 박선아

: 장길완 간사님께서는 최근에 소회를 “민주변론”에 기고하시며 정리하셨는데요. 활동가로서 삶의 쉼표 또는 특별한 챕터라고도 볼 수 있는 대체복무 3년은 어떤 시간으로 기록될 것 같나요?

○ 장길완

: 일단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면서부터 대체복무가 끝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참 길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요. 20대 초반부터 병역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생각하게 되었고, 2018년에는 병역법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왔죠. 그런데 2년이나 지난 뒤 대체역법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 대체역 심사를 1년에 걸쳐서 받고, 3년의 복무 생활까지 제도를 통과해 오는 시간이 오래 걸린 거죠. 지금도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그럴 것 같아요. 비교적 많이 적체가 해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심사 대기 기간이 워낙 길기도 하고요.

대체복무를 마치며 후련한 마음도 있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이 많이 부족한 상태로 도입된 제도이다 보니 불안전한 제도이기도 하고, 또 이 제도를 실제로 경험하며 실망감도 있어서 후련함과 복잡함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다만 <민주변론>에서 지면을 계속 할애해 주셔서 제가 총 3번의 글을 썼더라고요. 심사를 받고 한 번, 대체복무 1년 정도 되었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에 대체복무를 마치며 3년의 소회를 한 번. 그 시기마다 제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 또 그것이 어떻게 제도의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썼던 것 같아요. 그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어 시간이 지나 다시 볼 때, 이 시기에는 내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살았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점 같아요.

<장길완 활동가가 소집해제를 맞아 민변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축하파티에서 설명하는 장면>

 

 

○ 박선아

: 그럼에도 그 당시에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병역 기간보다 훨씬 길기도 하고요. 어떻게 대체복무를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었나요?

○ 장길완

: 앞서 이야기했듯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대체복무를 끝마치기까지 대략 10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 되었어요. 대학생 때 사회 운동과 접점을 가지면서 성소수자 운동 동아리를 같이 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같이 공부하기도 하면서, 군대라는 제도를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고민들이 지금에는 대체복무제도 개선의 아이디어와도 연결이 되었어요.

한국 사회에서 공적인 일,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의 최상위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설정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항상 이미지화되는 게 ‘60년대 수통을 아직까지 쓰면서 엄동설한에 철조망을 지키는 군인’이죠. 그런데 지금 사회복무요원들도 돌봄 노동 현장이나 지하철역 같이 높은 노동 강도에서 일하기도 하고 병역을 이행하는 방식이 되게 다양합니다. 또 완전히 동일한 조건에서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도 없어요. 시기별로 병역 제도와 병역 기간은 계속 바뀌어 왔고요. 그런데도 ‘남성적인 영역’의 노동들은 높은 가치로 인식되는 것에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군대라는 공간이 워낙 ‘진짜 남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고 상상되기 때문에 탈락되는 것들이 되게 많은 거예요. 소수자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런 존재들은 지금의 군대에서 불온하고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로 규정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 의식들로 제가 병역거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병역 이행의 시기가 다가올 때도 “나는 이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재생산하는 공간의 일원이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었고, 그 이후로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었죠.

그런데 대체복무제도가 생겨도 그냥 감옥에 간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그런 길도 있었는데 제가 대체복무를 선택한 이유는 일단 새로 생긴 제도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수용자 인권에도 일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활동에 도움 되는 소스들도 많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저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대체복무제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긴 시간이지만, 시작하기 전에는 잘 모르잖아요. 무언가 겪고 나서 ‘힘들었다’, ‘보람찼다’ 같이 사후적으로 평가하고 의미화하는 측면이 있잖아요. 약간 웃긴 이야기인데 공주교도소에서 복무할 때 저처럼 정치적 신념으로 병역거부를 한 다른 분이 있었어요. 감옥 안의 환경이 여전히 많이 열악하잖아요. 여름에 찌는 더위에도 에어컨도 없고 전반적으로 환경이 깨끗하지도 않고 그분이 그 광경을 이제는 실제로 봤을 거 아니에요?(웃음) 그분이 말하기를 “진짜 감옥을 보기 전엔 몰랐으니까 대체복무 생기기 전에는 병역거부로 감옥 가겠다고 말을 할 수 있었지, 알았다면 그 말은 못 했을 것 같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대체복무에 대해 비슷했던 것 같아요. 대체복무에 대해 알려진 것도 없었고, 그런 점 때문에 시작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길완 활동가가 2년 동안 지냈던 공주교도소의 대체복무 생활관>
판에는 “신념과 병역의 조화로운 대체복무”라고 적혀 있다. (출처: https://cowebzine.com/vol555/?pageType=sub&wzSec=0&wzId=1)

 

 

○ 조상필

: 지금은 대체복무를 경험하고 알게 되었으니까 그 당시로 돌아가면 대체복무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웃음)

○ 장길완

: 그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선택할 것 같아요. 그런데 고민되는 지점은 있어요. 많은 개혁 입법들도 그럴 것인데 법을 만드는 과정이 많이 어렵잖아요. 운영하는 각 부처의 훈령과 규칙들도 만들어져야 하는데, 시행령과 행정규칙 단계에서 법 제정의 원래 취지나 목적 등이 많이 왜곡되거든요. 저는 대체역법도 그랬던 것 같아요. 법 자체도 문제가 있는 상태로 도입이 되었지만, 실제 법을 운영하는 법무부가 일과 시간이나 복장이나 등등 과도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규정을 만든다든지, 양심과 신념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인권침해 상황이 발생한다면 직원들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법령의 어떤 부분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이해가 없이 만들어졌고, 필요한 부분들은 규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아요. 다시 돌아가도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선택하긴 하겠지만 이 제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설정되도록 초기의 제도 도입 시기에 활동가의 위치에서 더 개입하고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더 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 박선아

: 이번엔 좀 가벼운 질문으로, 혹시 대체복무 중에 즐거웠던 일이 있었다면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 장길완

: 즐거웠던 일은 있었을까요?? (웃음) 제 취향의 사람이 없어서, 로맨스 같은 것도 기대했었는데 없었고. (웃음) 그런데 보람 있었던 일은 있었어요.

대체역 복무관리규칙을 보면 ‘인권진단’이라고 ‘인권침해를 당했는지 조사’하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분기별로 한 번씩은 복무만족도 조사를 하게 되어 있어요. 저는 당연히 엄청 빼곡하게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이건 인권침해고’ 이렇게 써서 내기도 하고, 국민신문고로 민원도 많이 제기했었던 것 같은데요.(웃음) 대체복무로 오는 대다수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에요. 그분들도 이 제도를 직접 겪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그 문제점들을 어떻게 정리된 공적인 언어로 표현할 것인지, 어떤 절차들을 이용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죠. 제가 복무를 거의 마쳐갈 올해 4월 말에 계속 요청들이 있었어요. “강의를 한번 해달라” 그래서 무슨 강의를 원하냐고 물어봤더니 ‘인권진단이나 복무만족도 조사 잘 쓰는 법,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는 방법 등’에 대한 강의를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30분 정도 강의를 해 드렸어요. 그런데 강의를 하기 전에는 특별히 3년의 대체복무를 마친다는 후련함 같은 감정이 별로 없었거든요. 계속 정신없었고, 상해 여행을 앞두고 여행 계획을 짜는데 집중하기도 했고 대체복무의 마침표 같은 느낌이 없었는데, 그 강의를 통해 마무리한다는 느낌과 함께 즐거움을 느낀 것 같아요.

<대체복무 대원들 대상으로강의를 진행하는 장면>

 

 

○ 조상필

: 대체복무를 하기 전에 활동가로서 지내셨잖아요.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지내다가 폐쇄적·위계적이며 규율이 있는 강제적 집단생활을 하는 공간으로 갔는데, 그 공간에서 비합리적이라던가 폭력성이라던가 문제의식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대체복무 환경에서 규율을 거부하거나 문제 제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요. 구체적인 사건이나 갈등, 내적 고민들이 있었다면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 장길완

: 그런 일은 너무 많았죠. 일단 복무 기간도 엄청 긴데 또 교정시설이고, 게다가 제도적으로 이용할 만한 근거가 되는 법적 조항들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초반에는 저도 눈치를 많이 봤죠. 문제 사항이 발생했을 때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잖아요. 공식적인 창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복무관리관’이라고 해서 교도관들 중에서 2명~3명 정도의 직원들이 대체복무를 관리하는 전담 직원으로 업무 배치가 되거든요. 이런 ‘복무관리관’들과 협상을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초반에는 협상도 많이 시도해 보며 아예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모든 것들을 다 법령 안에서 다 규율하고 매뉴얼화 할 수 없는 부분들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미시적인 부분들은 협상으로도 많이 풀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대체복무를 시작할 때 차별금지법 제정 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들어갔는데 소집일이 보통 빠듯하게 나오거든요. 그때 29살로 거의 끝자락에 있어서 거의 한 달도 못 쉬고 소집이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터미션이 너무 없이 들어가서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복무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웃음) 그러니까 문제 사항이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저는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병역거부 신념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인권의 관점이라든가 다양성의 가치들이 저에게 중요한데 그것들과 무관한 공간인 거잖아요. 여기에서 다양성은 불필요하고 제거되어야만 하는 요소들이고,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명령 체계 안에서 질서가 잡혀야 하는 공간으로서 타인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는 공간이니까 정말 사소한 부분들부터 큰 영역들까지 문제 제기할 것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그런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계속 시비 턴다”고 받아들였겠지만, 저는 계속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예컨대 교도관들과 대다수의 대원들이 남성, 동성 사회의 호모 소셜이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소수자의 특징들을 희화화해서 개그 요소로 쓰기도 하고요.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성소수자 혐오적 발언을 할 때 일 대 일로 대응을 했지만 매번 하기엔 힘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인권교육의 정례화’ 같은 제도 도입 취지와 맞는 방식들을 고민해서 도입하라는 요구를 많이 했어요. 통제 중심의 규율적인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도적인 방식들에 대한 것이죠.

<2023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진행된 대체복무 제도 토론회>

 

 

○ 박선아

: 간사님은 페미니즘과 퀴어 인식론에 많은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위계 의식이 강한 대체복무 문화 속에서의 3년간의 경험이 간사님의 정체성과 연대 방식에 어떤 성찰을 남겼나요?

○ 장길완

: 대체복무를 하기 전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제 인간관계망에는 인권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제 직장 동료, 친구들, 지인들이었고, 그 고민과 무관한 건 가족들밖에 없었죠.(웃음) 그런데 갑자기 완전히 다른 문법이 통용되는 세계 속에 들어가보니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진짜 소수구나’라고 다시 한 번 객관화라고 할까요? 우리가 적은 수의 사람들이었지. 물리적으로 진짜 적구나! 이런 것도 많이 느끼고. 이 사회를 바라보고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인식론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세계관’이 있는데, 저와 세계관이 굉장히 다른 사람들을 집단으로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교도관이나 ‘여호와의 증인’ 대원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문제 제기를 하거나 제가 수용할 때, 모든 과정에서 전제들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 대체로 ‘여호와의 증인’ 대원들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동성애도 반대하고, 제 기준에서는 성차별적인 문화인데 그런 사람들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는 무엇일까? 이런 것을 생각해야 했어요.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3년을 통과하며 제가 가진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던 것은 아닌데, 어떻게 보면 저와 다른 그들의 생각들을 청취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민주사회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외딴섬에 가둬놓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의 사회에 모여서 서로가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되니까, 그분들에게도 제가 생소한 존재였을 것 같아요. 너무 너무 특이하고 말도 안 되고 자기들은 매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저는 계속 딴지를 걸면서 “이건 모두 문제다”라고 하니까요. 이력도 너무 특이한 사람이니까 그들도 제가 생소했을 텐데, 어쩌면 그분들에게도 저의 존재가 다른 생각을 청취하는 기회가 되었던 거죠.

복무 하면서 수잔 팔루디의 <다크룸>을 읽으며 타인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이렇게 지난하고 힘든 일인데, 그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스트 윤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물론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한 부분들에 대해 화를 많이 냈던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왜 윤석열을 옹호할까?’ 이런 생각들을 추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었던거죠. 물론 좋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가 대체복무 들어가기 직전에 민변 출판홍보팀에서 인터뷰를 한 번 했었거든요. 그때 인터뷰에서 차별금지법 얘기를 주로 했었어요. 제가 튀는 사람이다 보니까 교도관이나 ‘여호와의 증인’ 대원분들이 제 이름을 인터넷에 많이 검색해 보셨더라고요. 대원 중에 한 명이 “(출판홍보팀에서 한) 인터뷰를 봤는데 차별금지법이 되게 필요한 법인 것 같다. 나도 제정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라고 이야기를 건네더라구요. 그들 교리상 차별금지법은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일 텐데 말이에요. 또 어떤 교도관은 제가 주말 외출이나 외박 때 윤석열 퇴진 집회에 나가 있을 때, 따로 연락을 주시면서 ‘그런 거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응원한다.’라는 말을 해 준다던지. 그런 사람들을 간혹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죠. 뭔가 그런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웃음)

<2025 서울퀴어퍼레이드 – 민변부스 앞>

 

 

○ 조상필

: 우리나라에서 “남성은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와 같은 인식이 자리 잡혀 있고, 대체복무에 대해 “군대에서 고생 하기 싫어서 편하게 가는 것 아니냐” 등의 이야기로 형평성의 문제를 따진다거나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대한 생각이나 형평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 장길완

: 한국 사회나 어떤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들이 필요하죠. 그 중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군사적인 방식으로 국방부 중심의 국가 안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최우선의 가치로 오랫동안 이야기가 되어 왔잖아요. 저는 병무청 등이 여전히 시민들을 병역 자원으로 서열화하고 위계화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체역 심사위원회도 병무청 산하에 있고, 병역 자원을 하나라도 자기들의 소유로 두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국가 안보의 시대를 넘어 사람 안보라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필수 영역의 노동들에 대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많이 이야기됐었던 것 같아요. 돌봄 현장이라든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됐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은 군대라는 군사주의적 시각에서는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논리하에서는 남성 중심의 지키는 자와 보호 받아야 되는 여성 혹은 소수자들의 구도가 견고하게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형평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계속 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논리 체계 안에서는 영하 40도의 추위에 벌벌 떨면서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비견될 수 없는 거예요.

사회복무요원이 하는 일은 더 쉽다고 생각해서 복무 기간을 늘리고, 대체복무요원 같은 경우에는 (병무청의 시각에서는) 병역기피자로 굉장히 의심이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병역기피를 안 하게 만들기 위해 현역 군인보다 더 고강도의 기간과 형태를 설정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대체복무제도 도입 당시에 병무청은 대체복무에 있어서 현역 군인과의 형평성과 현역 군인의 박탈감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고, 두 배의 기간을 합숙 복무하는 안이 만들어진 거죠. 또한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곳이 교정시설밖에 없었죠. 소방에서 예산도 없고 합숙 시설도 없다며 안 받는다고 그랬었거든요. 이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교정 시설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교정시설에서 합숙 대체복무로 제도가 시행된 거죠.

결국 이 제도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현역 군인과의 형평성이 아니라 공공성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시각이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기여가 가능한 곳으로 배치되는 것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요양 시설이나 간병 같은 경우 노동 강도가 높잖아요. 그런 복무지에 배정받은 사람은 복무 강도가 높으니까 그에 맞추어 복무 형태나 복무 기간을 조정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복무지의 경우에는 비교적 노동 강도가 낮으니까 그에 비례해서 기간을 조정한다든가 등의 방식으로 재설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기계적인 형평성을 들이댄다면, 현역 군 복무를 하는 사람들도 형평성이 안 맞거든요. 병역 제도가 몇 년 사이에도 많이 바뀌고, 병무청이 하는 시행령과 규칙들도 매년 바뀌거든요. 그런데 핸드폰을 쓸 수 있었을 때 군 복무를 했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자들에 비해 복무 기간을 더 늘려야 하거나, 예전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국가가 보상이라도 해주거나, 이렇게 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형평성은 허상에 가까운 말인 거죠. 그래서 형평성의 가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군사주의적 시각에서 대체복무제도가 탈출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대체복무 개선을 위한 활동가 모임에서 2024년 5월에 진행한 대체복무 토크쇼 사진>

 

 

○ 박선아

: 대체복무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주로 무엇을 하며 지내셨나요?

○ 장길완

: 주로 오전 8시에 출근을 해서 12시까지 일을 하고 1시간 쉬었다가 1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것이 보통의 일과인데요. 소마다 조금씩 조정되기도 하고 업무지 성격상 일과 시간이 조정되긴 하는데, 대체로 시작이 8시니까 아침은 그보다 훨씬 일찍 먹고요. 군대와 유사하게 인원점검이라는 걸 하고 그 이후 업무를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모범수용자(교도관의 말을 잘 듣고, 다른 수용자들과 싸움을 안 일으키는)들이 선발이 되어 수용동 도우미로 일을 했어요. 수용자의 옷을 세탁하고 수선하는 세탁 부서라던가, 청소하고 쓰레기 수거하는 환경 미화 부서, 수용자들이 영치금으로 사 먹는 음식 등을 주문 받아서 배달해 주는 구매 부서 등이 있는데, 대체복무 운영 초반에는 대원들이 그런 일들을 주로 했어요. 그러니까 수용자가 하던 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죠. 과거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수형복을 입고 그 일들을 했다면, 대체복무제도 이후에는 제복을 입고 그 일을 주로 했던 거죠. 저는 그 일 자체는 공익적이지만, 그 효과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수용자로서 교정시설에 있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그대로 교정시설에 배치된 것도 문제인데 하는 일도 똑같다 보니 교도관들이 여전히 수용자로 대했던 거죠. 다른 대원들이 이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많이 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교정 본부에 권고를 했어요. “대원들 특기를 살려서 업무 영역을 확대하라”라고 권고를 해서 법무부가 그 권고를 수용하겠다고 했는데, 그 수용의 방식이 대원의 특기나 의사를 반영해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도소의 인력 부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한 거죠. 교도소에는 중앙통제실이라고 교도소 내에 있는 CCTV가 다 보이는 방이 있어요. 권고 이후로 대원을 그곳에 투입해서 감시 성격의 업무를 맡긴 거죠. 그래서 지금 대부분의 대원들은 직원을 보조해서 직원의 업무를 대체 수행하는 방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죠. 저는 구매 부서에 있어 봤고, 외부 진료팀이라고 수용자들이 외부 병원에 갈 때 도주의 우려를 막기 위해 감시를 보조하는 업무라든지, 정문에서 문 열어주는 업무도 했었어요.

<서울구치소에서>

 

 

○ 조상필

: 밥은 맛있었나요?

○ 장길완

: 밥이요? 안양교도소 밥이 맛있었어요.
제가 공주교도소랑 서울구치소에 있었는데, 서울구치소는 특이하게 대원들 중 몇몇을 수원구치소랑 안양교도소에 파견을 보내요. 그래서 아침에 거기에서 차량이 와요. 그러면 저희를 태워서 하루 동안 거기서 일하고 다시 서울구치소 생활관으로 복귀하는거죠. 그렇게 안양교도소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안양교도소 직원 식당 밥이 제일 맛있었어요. 약간 서울구치소랑 공주교도소는 평범한 급식 정도 느낌이고요. (웃음)

 

○ 조상필

: 지금까지 장길완 간사의 3년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요. 앞으로 대체복무제도를 개선하거나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떤 점을 고려할 수 있을까요?

○ 장길완

: 저희가 ‘대체복무 개선을 위한 활동가 모임’이라고 한 줌 단위로 작은 자조 모임을 했었는데,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거부자들과 전 대체역 심사위원을 했던 활동가와 같이 연재글을 내기도 하고 토크쇼도 진행했어요. 그러면서 이 제도를 바꾸는데 우선 순위를 이야기한다면 뭐가 있을까 고민했을 때, 저는 일단 교정시설을 탈출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복무 영역을 다양한 기여가 가능한 방식으로 상상해 보자고 이야기를 드렸던 것 같은데, 군인들과 비교 평가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시켜서 기계적인 ‘형평’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 대체복무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처벌받는 수용자에서 제도적인 대체복무로 병역 이행을 함에도 교정시설에 계속 있었잖아요. 그렇게 위치가 안 바뀌니 가시화가 안 되는 거예요. 병역거부자들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긍정 평가든 부정 평가든 시민들과의 접점이 없는 상태로 그 안에서는 부조리나 불합리한 일들이 반복되어 발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대체복무가 교정시설 말고 다른 다양한 분야들로 확대가 될 필요가 있어요.

이건 개인적인 의견인데, 요즘 장애계에도 핫이슈 중 하나가 탈시설이잖아요. 그런데 탈시설에는 다양한 인적·물적인 지역사회의 자원들이 필요하고, 그런 노동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함께 할 수 없을지, 대체복무가 그 영역으로는 확장될 수 없는지, 그런 생각들도 많이 했어요. 결국 군 복무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노동’, ‘공공적인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조망에서 나라를 지키는’ 한 가지 이미지가 아닌,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영역에 복무하는 일이 가시화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이를 함께 수행하는 방식으로 제도의 근본적인 시각이나 방향 설정이 바뀔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구체적인 법조항을 이야기 하자면, 최근 사회복무요원 괴롭힘 문제가 대두됐었잖아요. 대체복무제도에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들이 신설된다든가, 차별 금지 조항 같은 것들이 신설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다양한 배경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병역거부를 하고 대체복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안전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불화와 연결 – 인터뷰>

 

 

○ 박선아

: 그럼 이제 민변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요? 다시 복귀하셨는데 민변에서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 그리고 민변에 복귀해서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 장길완

: 먼저 새로운 보금자리가 생겨서 좋았습니다. 대체복무를 가기 전 상근 활동가로 있을 때는 사무실이 이사하기 전이라서, 복귀 후 새로운 민변 건물을 보게 되어 좋았어요. 그리고 여전히 바쁘고 일이 많은 조직이라는 게 지겨우면서도 또 여전히 할 일이 많구나. 저희가 내란 청산이란 과제도 있지만 또 사회대개혁이라는 중요한 이정표가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각자 바쁘게 보내고 있구나! 이런 것도 전 좋았던 것 같아요. 아직 복귀한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그렇겠지만 여전히 이 공간을 계속 지켜주고 있는 상근자들이나 회원들이 너무 반갑고 또 새롭게 온 사람들도 너무 반갑죠. 제가 엠비티아이가 ENFP라서 새로운 얼굴들 보는 것도 좋더라고요. 제가 민변 정기총회하는 날이 복귀일이었는데, 그때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여서 즐거웠던 것 같아요. 3년 사이에 새롭게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생겼구나 해서.(웃음)
그리고 2017년에 상근을 시작하면서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 민변부스를 내자고 제가 처음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이후 민변이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면 부스를 계속 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상근을 할 때 미투 운동도 있었고 성소수자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던 시기이기도 해서 페미니즘 이슈라든가 소수자 의제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는데 지금은 이런 부분이 훨씬 민변의 중심 활동으로 더 자리 잡아 가고 있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민주주의를, 민주주의가 포함하고 있지 못했었던 존재들을 이 사회 안에 계속 포함시키면서 민주주의의 내용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요건들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달라진 풍경이구나! 그런데 여전히 좀 짜증 나는 건 국가보안법은 아직 폐지가 안 됐고, 차별금지법이 여전히 제정이 안 되었다는 것이랄까요? 저는 대체복무 가기 전에 ‘갔다 오면 제정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차별금지법이 여전히 새 정부의 주요 과제로 채택도 안 되고 이런 것들이 답답한 지점이죠. 문화적으로도 많이 바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중파에서도 성소수자들이 엄청 많이 나오고, 서울 퀴퍼나 지역 퀴퍼도 진짜 사람 많이 오는데 정치와 법이 전혀 바뀌지 않고 적체되어 있는 상황들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 게 아닌가? 싶어서 이 활로를 뚫는 데 집중하는 역할들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장면 – 민변 2층회의실 / 장길완, 조상필, 박선아>

 

 

○ 조상필

: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장길완 간사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시는 회원분들께 어느 정도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게 된 것 같아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원분들께 인사 말씀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 해볼까요?

○ 장길완

: 교도소의 직원 식당을 가면 TV가 있어요. 뉴스에서 이태원 참사, 아리셀 참사, 사회적 문제들, 이슈들 등이 뉴스로 나올 때 (그런 참사들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여전히 열심히 활동하는 민변 회원들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보일 때 그것이 저의 자부심이었던 것 같아요.
윤석열 정부라는 심각하게 나쁜 외적 조건이 있더라도 결국 우리에게 필요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중단 없이 해나가는 그 모습들이 저에겐 자부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대체복무를 하면서 감옥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이 3년의 기간을 보내면서 든든함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회원분들과 활동가분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 주시길 바라고 저도 상근 활동가로서 보폭을 맞춰가면서 열심히 옆에서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박선아, 조상필

: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민변에서 자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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