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더위에 지치는 요즘이다. 해갈(解渴)에 미치지 못하는 비는 시원함을 주기보다 꿉꿉한 습기를 더한다. 도시가 뜨거워질수록 여행과 피서가 간절해진다. 구름바다 아래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들의 능선, 내리쬐는 햇살 아래 푸른빛을 더해가는 바다를 떠올리면 이 여름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자연 못지않은 여행의 묘미는 단연 식도락(食道樂)일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이왕이면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프랜차이즈보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 가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찾는 것이 노포(老鋪), 백년가게이다. 백년가게는 여행의 필수코스가 되기도 한다. 일례로 1945년에 창립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 본점은 자타공인 군산여행의 필수코스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과 동국사, 군산내항을 지근거리에 두고 있는 이성당 본점은 군산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명실상부 군산의 터줏대감이자 전국 곳곳에 분점을 내기까지 한 이성당은 백년가게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그러나 모든 백년가게가 이성당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2022. 4. 21. 강제집행으로 점포를 잃은 ‘을지OB베어’가 그러하다. 을지OB베어는 한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생맥주 가게이자, 노가리를 맥주 안주로 제공하는 ‘노맥문화’의 계기를 만들어낸 가게이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인 을지OB베어는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에는 주류 점포 최초로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가게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을지OB베어가 가진 상징성과 노가리골목의 문화도 임대인의 퇴거요구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원하는 만큼 임대료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에도 임대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서울시와 중기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은 개인의 재산권에 관련된 부분이라며 어떠한 지원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소송이 시작되면서 40년의 역사는 도리어 을지OB베어의 발목을 잡았다. 상가임대차법의 계약갱신요구권은 임대차기간이 10년을 초과하지 않는 경우에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이은 패소와 확정판결, 강제집행 끝에 백년가게 을지OB베어는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행정도 법도 지켜주지 못한 을지OB베어에 남은 것은 시민들의 연대뿐이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공대위를 조직하고 문화제와, 강연, 예배를 진행하며 임대인에게 상생을 호소하였다. 법원 확정판결을 번복할 수는 없지만, 임대인의 무분별한 골목상권 장악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등 구조적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공대위의 상생 요청에 가처분신청으로 답하였다.
임대인은 과거 을지OB베어가 있던 장소로부터 150m 반경에 이르는 거리 내에서 을지OB베어 사태를 알리는 스티커, 현수막, 피케팅, 전단지를 배포하거나, 주간에 75db, 야간에 65db을 초과하는 연설, 구호제창, 노래 부르기, 음원재생 등 소음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임대인에게 하루 당 100만 원을 지급하도록 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하였다.
임대인이 피케팅조차 금지해달라고 주장한 반경 150m는 을지로 노가리골목을 넘어 무려 청계천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면적이다. 더욱이 노가리골목은 중구청의 허가 아래 야장 영업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평소 소음이 80db을 넘는 곳이다. 임대인 측의 요구는 사실상 노가리골목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집회, 표현행위를 막아달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행히 법원은 건물 반경 100m 이내에서 집회시위법상 소음기준에 따라 집회를 진행하라는 제한만을 남긴 채 임대인의 모든 신청을 기각하였다. 법원은 임대인의 건물 소유권(방해배제청구권)이 중요한 권리라고 하여도, 공대위가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장소가 임대인 소유 건물이나 부지가 아닌 인근 도로라는 점, 공대위가 집회, 문화제 등을 통해 주장하는 내용(임대인과 임차인의 상생)에 사회적 상당성이 있다는 점, 이러한 내용의 표현금지를 명하는 것은 집회·시위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제약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결정의 근거로 삼았다. 임차인의 권리 보호를 촉구하는 을지OB베어 공대위의 요구가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임대인이 소유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임대인의 가처분 신청 대부분이 기각되면서 을지OB베어 공대위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집행과정에서 불거진 형사상 문제 등 해결할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다. 중기부는 을지OB베어가 다른 곳으로 옮겨 영업을 하면 백년가게로 인정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다. 앞서 이성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백년가게는 가게를 찾는 이들의 이야기와 지역의 문화가 켜켜이 쌓이며 단순한 가게를 넘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을지OB베어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난이 그저 역사가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조은호 변호사(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위원)